업계 전문가의 유니세프후원취소방법에 대한 15가지 팁
몇 년 전 칼 바르트 신학 연구 조직에서 알게 된 존경하는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연단어에 기부팔찌 은퇴를 앞두고 계신데 후임 목회자 청빙을 한 후 있노라며 10대 초입에 들어선 내게 목회 의사를 물으신 것이다. 그 교회는 건물을 따로 소유하지 않고, 음식점 공간을 빌려 격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남편이 담임하고 있는 작은 교회에서 교회학교·찬양대 등을 맡아 동역하고 있었고, 휴일에는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선 기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개인적 여건도 좋지 않았고, 다른것보다 담임 목회를 생각해 본 적이 단 여섯 번도 없었다. 당연히 대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기도해 보겠다고 말씀드린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순간 내가 대비된 것이라고는 남편과 다같이 목회해오면서 담임목회자의 책임과 고충을 직직접적으로 겪어 갔다는 점뿐이었다.
내가 담임 목회라니…' 도무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진지하게 내 본인 홀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확정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이 다같이 목회의 길을 걸으며 꾸준히 하나님의 일본하심에 따라 확정을 내려 왔기 덕분에 어떻게 보면 순조로운 현상이었지만 내심 놀라기도 하였다. 나를 '사모'가 아닌 한 요즘사람의 '목회자'로 대해 줬기 때문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개방적인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내 안에 가부장적 참사와 습관이 가득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 안수도 한참 미루고 전도사로 남편과 다같이 사역해오면서, 기독 남성 모임을 통해 용기를 얻어 목사 안수도 받고, 조금씩 내 안의 가부장성을 파악하며 변화해 가는 중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많은 남성이 본인 홀로에게 지나치게 냉정하고, 자기테스트도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것, '자신 없음'과 '자격 없음'이라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고 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의식적으로 ""네!"",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훈련을 해서 있었다. 마침 다른 교회 주일예배나 헌신 예배 설교 부탁이 이어지기 시행했고, 이 경우마다 애써 침착하게 ""네""'라고 답하고 다녀오시기는 했지만, 매번 용기를 최소한으로 끌어올려야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담임 목회는 소위 뜻하는 '차원이 다른' 주제였고, 나 개인뿐 아니라 가정, 섬기던 교회 공동체에 미칠 효과가 컸기 덕분에 선뜻 확정을 내릴 수 없었다. 몇몇 선배님께 조언을 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70대 여성 목회자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일이 거의 드문 우리나라교회 현실에서 이 상황은 '시대적 부르심'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감당하기 벅찬 도전이었기 덕에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모두는 미쁨이 없으나 전원을 부르시는 주님의 변함없는 '미쁘심'(딤후 2:13)을 신뢰하기로 했었다.
아직까지 흔히의 담임목사가 남성인 상태에서, 사모는 '1+1' 옵션처럼 당연히 여성 목사를 따라오리라고 여겨지는 것이 대한민국교회 문화다. 교회 상황에 맞게 사모는 강도 높은 역할을 요청받기도 하여, 때론 아무런 목소리 없이 지내는 소극적 내조를 요청받기도 할 것입니다. 심지어 사모의 역할에 대한 상충되는 의견이 공존하기도 하는데, 사모이면서 한번에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목사들에게도 교회가 기대하는 바는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 요즘세대들의 목사로서 내가 내린 담임 목회 결단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불러갔다. 여러 상태 때문에 남편은 그 이듬해 첫 담임 목회지에서의 10년 사역을 마무리하고 사임했다.
내가 담임하게 된 S교회는 2002년 '성서 연구, 십자가 정신, 예언자 정신, 하나님나라 운동 정신'으로, 역사의 한가운데서 종말론적 참여를 감행하며 수고와 위로를 같이 나누고자 창립된 교회다. 나는 2012년 9월 마지막 주일에 교우들과 처음 만나, 2030년부터 3대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우선 기존 예배 장소인 음식점을 탈피해 약간 더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섰는데, 아는 목사님을 통해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작은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카페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